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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구축(驅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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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구축(驅逐)한다
  • 김남윤 대한치주과학회 공보이사
  • 승인 2013.08.16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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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신문사에 기고할 때마다 늘 초조하게 생각하는 것은 정작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아니라 어휘를 정확한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하지 않았나. 같은 어휘라도 여러 가지의 의미를 지닌 탓에 어휘의 정확한 선정은 언제나 문장을 쓰는 이들의 애간장을 태우게 된다.
최근 한 단어를 두고 지금까지 내가 상식으로 알고 있던 의미와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게 되어 혼란스럽게 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제목처럼 ‘구축(驅逐)한다’는 어휘다.
의미는 다르지만 구축은 한자로 구축(構築)이라 쓸 수도 있고, 이는 쌓인다는 의미이며, 관절구축(關節拘縮)은 관절이 굳는다는 의미의 의학용어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이미 알고 있듯, 이 단어를 처음 접하는 것은 ‘악화(惡貨)는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 <Bad money drives out good money>일 것이다.
16세기 영국의 재무관이자 엘리자베스 1세의 재정고문이었던 토마스 그레셤(Thomas Gresham)이 제창한 화폐유통에 관한 법칙이다. 어려운 경제용어로 풀어보면, 표시하는 액면가치(명목가치)가 같으면서 물건으로서의 가치(실질가치)가 다른 두 화폐가 있을 때 실질 가치가 높은 쪽(양화)은 별로 유통되지 않고 실질 가치가 낮은 쪽(악화)이 널리 유통된다는 의미다.
시대 배경을 살펴보면 영국에서는 동이나 은을 주된 화폐로 썼는데, 정부에서는 재정 부담을 줄이고자 이따금 순도가 떨어지는 동화나 은화를 생산해 냈다. 순도가 높은 은화는 쓰지 않고 저장해 두고 순도가 낮은 은화만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구축(驅逐)’이라는 단어는 ‘drives out’을 해석한 것인데, 어휘사전을 살펴보면 ‘구축(驅逐)’은 ‘몰아서 내쫓음’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drives out’은 영어로 풀이하자면 ‘to make somebody/something leave or disappear’ 로 ‘사람이나 물건을 몰아내다. 사라지게 하다’ 라는 뜻을 갖고 있다.
시대나 상황에 따라 이런 사례는 많이 볼 수 있다. 인터넷 서점은 동네 서점을 구축했고, 온라인 음반 시장은 레코드 가게를 구축했다. 그 외에도 대형마트들은 다수의 동네 슈퍼들을 구축했으며, 프랜차이즈 빵집과 치킨 집은 동네 작은 빵집들과 시장 통닭을 구축했다. 요즘은 착한 가격의 중국집은 제값 받는 많은 나쁜(?) 가격의 중국집을 구축했다. 모두 우리에게 친숙한 것들이었고 필요한 것들이나, 나 혼자만 잘되면 된다는 이기심과 거대 자본과 우리의 손에 의해 구축했다. 그러면서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퇴출되었다고 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토마스 그레셤의 경제법칙이 제일 처음 한글로 번역된 것은 일제 강점기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그만큼 구축이란 어휘는 생소하니 말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저장해두다, 쌓이다’라는 뜻의 구축(構築)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시장에서 ‘몰아내고 사라지게 하다’라는 가혹한 뜻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그러나 ‘구축하다’라는 어휘를 더 심각하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생겼다. 어느 날 중학생인 아들이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것이라며 보여준 ‘진격의 거인(進?の巨人)’이라는 일본 만화영화에서다. 처음에는 인간을 잡아먹는 거인이나, 칼로 거인의 뒷덜미 부분을 잘라 죽이는 인간이나, 잔인하기 짝이 없는 그 만화를 왜 좋아할까 하며 보기 시작했는데, 뜻을 알 수 없게끔 빠르게 내뱉는 도입부의 독일어와 더불어 현학적이고 철학적 성찰을 요하는 주제가의 가사가 묘한 리듬과 멜로디를 타고 중독성이 있는 것 같았다.
또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 가족의 상실에 대한 아픈 상처를 복수로 이어가는 주인공의 노력과 친구들의 도움이 눈물겹게 의리로 그려진다. 거인에 의해 어머니를 잃고 훈련병으로 들어가 실전에 투입된 주인공이 거인을 만나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눈물을 흘리며 허공에 외치는 말이 바로 “구축해주겠어(驅逐してやる )~”라는 것이었다. 분노를 넘어서 주인공의 살의(殺意)를 느끼게 하는 처절한 대사였다. 이때의 구축은 대상을 섬멸(殲滅)하겠다는 뜻이다. 같은 의미로 해군에서는 구축함(驅逐艦)이 있다. 영어로는 ‘destroy’이다.
 얼마 전 저가 네트워크 치과가 지점 수를 다시 늘려간다고 ‘진격의 00’라는 표현을 쓴 기사를 봤다. 여러 기사에서 상승세의 가파른 성장이나 몸집이 거대해진 것을 만화영화의 제목을 차용해 ‘진격의~’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원래 ‘진격(進?)’이란 말은 ‘적을 치기 위하여 앞으로 나아간다’라는 뜻이다. 영어 표현도 실제로는 ‘make a push, advance’란 뜻으로 쓰이고, 만화영화에서는 ‘attack on’이라고 쓰고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성장과 세를 불리기 위해 동종 업종이나 동료를 적으로 만들어 치기 위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진격’이란 표현은 매우 적절한  듯하다. 그럼 이제 구축(驅逐)해줄 일만 남은 것인가?     
<어휘 사전 및 출처> : 위키디피아

 

김남윤 대한치주과학회 공보이사
김남윤 대한치주과학회 공보이사 arirang@dentalarirang.com 기자의 다른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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