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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호 원장의 역사이야기] 일본의 性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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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호 원장의 역사이야기] 일본의 性문화
  • 안승호 원장
  • 승인 2013.08.08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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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호 원장

 

에도(江戶)는 동경의 옛 지명이고 에도에는 도쿠가와 바쿠후(막부)가 있었어요.
바쿠후라 하면 무신 정권을 말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고려의 최씨 정권을 생각하면 될 거에요.
고려의 왕이 있었지만 허수아비였고 최씨 무신 정권이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일본의 경우 왕은 교토에 있고 막부는 에도에 있었어요, 교토의 왕은 허수아비였죠.
번藩 이라는 소小 국가들이 수 십 개가 있고 에도의 막부(중앙정권)에 충성을 한다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일본의 국가 형태였어요.
번藩은 거의 개별 국가나 다름이 없었어요.
에도에 있는 막부 정권은 중국이고 번국은 조선이나 월남 같은 거였다고 이해해도 괜찮을 거에요.
중국이 통치하는 지역구가 천하였다면 일본 또한 나름의 지역구 천하였습니다.

 

에도에 있는 도쿠가와 막부 정권은 번국들이 배반을 할까 두려웠어요.
그래서 상수리제도, 기인제도와 같은 제도를 만들었어요.
베르사이유 궁전과 같은 이유죠.
에도에 영주(다이묘)의 가족이 머물고 일정 기간 영주도 에도에 머물러야 했어요.
소속 번국에서 에도까지 다이묘를 호위하는 무사들과 그 부속 식솔들의 대이동이 잦았고 그 경비를 대는 것이 만만치 않았어요, 파산하는 다이묘들도 있었어요.
막부 입장에서는 파산하는 다이묘란 반가운 존재인 거죠, 도쿠가와 막부 말기에는 전 일본의 1/4이 도쿠가와 가문과 연관된 영지로 바뀌게 됩니다.
에도에서 멀리 있다는 것은 ‘에도로부터 독립적이다’ 란 뜻이고 에도 정권에서도 안티 성향의 번국을 멀리두는 것이 좀 안심이 돼죠.
에도에서 멀다라는 것은 그만큼 ‘경비 지출이 크다’란 것이고 파산의 위험이 높았어요.
그만큼 멀리 있는 번국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은 에도 입장에서는 전 일본을 통치하는 데 효율적이였어요.
이러 저러한 이유로 멀리있는 번국들에게 에도 막부에 대한 반감은 깊어 갔고 실제 이러한 반감이 표출된 것이 바로 메이지 혁명이였어요.
메이지 혁명의 명분이야 존왕양이(왕을 높이고 오랑캐를 몰아낸다)였지만 혁명의 주축은 싸쓰마번과 조슈번이였고 싸쓰마와 조슈는 에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번국들이였죠.
이들이 안티 에도 막부 세력들의 리더였다는 것 또한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암튼 이러한 상수리제도 때문에 일본의 상업은 발전을 하게 되었고 그와 함께 향락 산업도 커졌어요.
특히 에도에는 거대 상업 자본들이 형성되었고 여기서 일하는 종업원들은 대부분 홀로 에도에 머무는 남성들이였어요.
또한 영주와 그 가족들을 돌보는 여러 번국의 많은 사무라이들이 에도에 머물고 있었어요.
각 번국들은 에도에 재경 사무소를 두고 있었는데 대사관이나 상사 주재원 같은 역할을 하였고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 또한 홀로 머무는 남자들이였죠.
에도의 귀한 물품을 자신의 번국으로 사서 보내거나 소속 번국의 물품을 현금화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죠.
에도에는 향락 문화에 대한 수요가 가득하였고 향락과 관련된 사업은 대박이였어요.
막부에서는 일정한 지역에 한정하여 공창을 운영하도록 하였지만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있는 법.
거의 대부분의 식당이나 찻집 여관 등에서는 손님들의 수요에 응하는 성 접대(응응^^)가 일상화 되어 있었어요.
이러한 성性적인 이야기는 근거가 확실하지도 않고 그러하리라는 추측만을 하는 수준에 머무는 것은 대부분이에요.

조선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이 기록으로 남기는 사람들이 양반이고 남자였어요.
대체로 00잡록이나, xx기, xx담, 일기 등에서 기록된 내용이거나 유추하는 것이 대부분이니까요. 1700년대 조선 기록에 의하면 일본이나 중국의 춘화를 많이 수입하였는데 춘화에 대한 수요가 엄청났고 따라서 그 가격이 급등하였죠.
즉, 춘화를 그린다는 것은 엄청난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일이였어요.
우리나라 춘화의 역사라 한다면 그 종조를 누구로 삼든 김홍도에서 발하고 흥하기 시작하였다고 할 것입니다. 그때부터 돈이 된다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신윤복에서 그 꽃을 피웠다 하겠지만 중국풍 춘화나 일본풍 춘화가 대세였어요.
조선 측 기록에 의하면 일본인들은 누구나 춘화를 가지고 다니면서 그 흥을 북돋웠다고 하네요.
아마도 성인 비디오 대용으로 춘화를 즐겼던것 같습니다.

다음 편부터 하려는 내용은 저속하기가 그지없고 글로 표현하기가 민망할 정도 입니다만 그런 것들도 터부일 것입니다.
욕망을 부추킨다기 보다는 추잡하다는 느낌이 먼저 들 정도로 그지같은 내용들이지만 한풀 꺽어보면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면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갖게 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여러 잡록이나 일기들이 번역되어 나왔고 검색이 가능하게 된다면 ‘조선 전기와 후기의 성 풍속도’라는 재밌는 책이 나올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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