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곳 G시 보건소 구강보건실에 온지 벌써 6개월이 된 것 같다. 주 2.5일 근무라 일주일 근무를 2.5일에 몰아서 해야 하니 근무시간만큼은 바쁠 것 같았지만, 지방 보건소의 특징이라면 ‘바쁜 시간대’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담당 업무도 필자가 평생 해온 예방치과 진료에 국한되는 업무들 뿐이고, 아침 출근 후 이른 시간대 한 두 시간과 업무가 종료되는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바짝 바쁘다면 바쁘고, 나머지 시간은 그냥 멍하니 벽만 보고 있어야 한다.
만일의 민원인들(환자들)이 올 수 있으니 근무시간 내내 상주해야 하는 공무원들의 규칙 상, 중간에 갈 수 있는 곳이 화장실과 점심식사 시간에 식당을 찾는 것 이외에는 불가능하다.
그나마 점심 시간 한시간은 근무시간에 해당되지 않는(?) 자유시간이라 거의 모든 공무원이 자리를 비우면서 근처의 관악산이나 대공원 쪽으로 산책을 나간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이 때 G시 보건소 청사에 오면 전등마저 꺼져 있어, 오늘 쉬는 날인줄 알 정도일 것이다.
이런 사정에서 어쩌다 장애인 복지관이나 요양원 등의 외부 출장-업무대행인 필자의 출장비는 없다.-이라도 잡히면 오히려 즐거운 외출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요즘은 필자도 G시의 지리 공부도 할 겸해서 점심시간에 30-40분 정도 산책을 한다.
이곳을 떠날 때 아쉬운 마음이 들지 않으려고, 관내의 치과의사들과 알고 지내는 치과위생사들 이외에는 사귐을 자제하려고 하다 보니, 늘 혼자서 산책을 하게 된다. I. Kant도 아닌 주제에 보건소에 돌아오는 시각도 이제는 딱 맞는 수준이 되었다.
이번 주 초에 지방 치과대학에 있는 예방치과 후배교수로부터 메일이 왔다. 지난번에 제출한 논문이 최종적으로 게재가 확정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최종 수정을 필자에게 요청했다.
필자에게는 금년도에 가장 보람찬 날이 되었다. 귀가하자마자 집사람에게 G시 보건소에 와서까지 논문을 썼다고 자랑을 했다. 아내의 웃는 모습이 웃는 게 아닌 느낌(?)이 들었다. 퇴직 후부터는 경제적으로 좀 나아지나 하고 기대해 온 아내에게는 좋은 소식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필자에게 특기나 취미를 묻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화두(話頭)’를 꺼내기 어려울 때 자주 묻는 질문일 것이다. 그냥 ‘음악감상’이나 ‘독서’라고 얼버무린다. 여기서 더 깊이 들어오면 대답할 답이 생각나지 않으니, 정답은 아닐 것이다.
필자가 자신을 냉철하게 되돌아보면, 필자의 취미는 –부담스러운 답변이지만- ‘공부하기’이다. ‘세계적인 논문’을 여러편 발표까지 했더라면 ‘특기’로 ‘연구 및 논문 발표’라고 거창하게 이야기하겠지만, 훌륭한 논문 발표로 국내외에서 ‘수상(受賞)’한 여러 선후배들의 발자취도 따라가기 힘드니, 특기로 내세울 것은 없는 형편이다.
금년도 과업(?)처럼 느꼈던 논문 발표도 거의 마무리되었으니, 조금 시간을 내어 놀아 볼까도 생각했는데, 노는 방법과 수단을 모른다(?)는 핑계를 대면서 필자는 다음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지도 학생’이라도 있었으면 어깨에 힘주면서 ‘라떼 이야기’를 거들먹거리며 논문 제작을 지도했을 것을 아쉬워할 수 있는, ‘과거 필자의 오만했던’ 시기는 이미 지나갔고, 필자의 머리가 더 우둔해지기 전에 필자가 그간 연구해 온 내용을 남기고 싶을 뿐이다. -이러한 자료를 읽어줄 후학들에게 물어보지 않아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이곳 보건소의 낮 시간에 할 일 없이 벽을 보는 대신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다 보니 6개월이 지난 지금 두 번째 논문을 쓰고 있게 된 것이다.
S대 의과대학과 부속병원, 치과대학 및 치과병원이 함께 있었기에, 과거 80년대 초반의 예방치과 조교 시절에 구두 수선하는 부스에 들렀다가, 부스 사장님이 낡은 구두 한 켤레를 들어올리며, 본원 신경외과 교수님 신발인데 새 것을 사야 한다고 몇 번을 말해도 도무지 들은 척을 하지 않는다고 하시며 필자를 보고 웃어 주었다.
그 당시 필자는, ‘S대 의대 교수라면 논문이나 강의, 진료, 수술에 시간이 부족하다보니 그리 되었을 것’이라 당연하게 생각을 했었다. 지금 다시 드는 생각은, 그 교수님은 퇴직 후 본인만의 ‘취미’를 즐기면서 ‘삶이 여유로운 부자’가 되셨을까가 갑자기 궁금하기는 하다.
‘취미’가 ‘특기’가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아주 특별하고 행복한 경우에 해당한다.
재학생 동아리 활동으로 시작된 S대 야구부와 축구부에서 과연 국가대표 등으로 발탁된 선수가 있는지 찾아보면, 국가대표나 메이저리그, 유럽 축구리그에 진출한 선수는 없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가끔 이 곳 출신인 분들이 야구나 축구 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경우가 특이하게 눈에 뜨인다.
전문적인 ‘선수’들로 이루어진 타 대학 야구부와 축구부에서는 국가대표를 비롯해서 외국 명문 구단으로 진출하여 국위를 선양하는 유명한 선수들이 많이 배출된 것과 비교해 보면, ‘선수’가 아닌 ‘일반인’의 ‘취미’는 ‘취미’로 살려나가야 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취미’와 어울리는 ‘직업’을 택한 분들에게는 ‘축하의 인사’를 보내게 된다.
만약 독자분들 중 ‘특기’가 되기는 어려운 ‘취미’를 가진 분들이 계시면, 이를 받아들이면서 ‘본인의 취미’를 각별하게 즐기면 되는 것이다.
해가 바뀌는 시기이다. 새해 필자는 적지 않은 나이이지만, 개원가에서 아직도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계신 선배님이나 동기들 치과를 일주일에 한번씩이라도 견학하며 그동안 멀리 했던, 대부분의 환자들에게 필요한 일반적인 구강진료를 곁눈질로라도 복습해야겠다.
배움의 과정이 흥미진진할지 지루한 여정이 될지는 몰라도, 구강진료의 정석(定石)을 제대로 보여 주실 수 있는 냉철한 이성의 선배님이나 동기생을 찾아보아야겠다.
필자의 취미가 ‘공부하기’이니, 나이 탓에 진도가 늦더라도, 머리가 하얀, 예방치과를 ‘특기’로 진료해온 후배 또는 동기생인 필자에게, 귀찮더라도 온화한 눈빛으로 ‘평생을 연마해온 특기’를 보여주는 선배님이나 동기 원장의 진료과정 속에서, 필자가 그동안 등한히 했던 지식을 복습해야겠다.
과거, 40이 다 되어가던 필자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시면서, 필자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치과보철학을 열정적으로 가르쳐 주신 故 최경명 선생님(작고, 서울치대 13회 졸업)이 그리워지는 연말이다.
위 사진은 2016년 스승의 날 즈음에 최경명 원장님 후배 제자들이 ‘스승의 날’행사로 모였을 때 최경명 선생님과 촬영했던 사진이다. 항상 세상에 불만이 많았던 필자에게 따뜻하게 대해 주셨고, 필자에게 과분할 정도의 가르침을 주셨다. 돌아가신지 수년이 지나도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해 죄송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