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는 듯한 삼복더위라는 표현에 걸맞는 날씨에 자주 잠을 설치게 된다. 간단하게 점심 먹고 목욕탕이라도 가서 쉬었다 오려고 현관문을 여는 순간, 택배 상자가 문을 막고 있다.
아무래도 오전의 택배 안내 문자의 주인공인 듯하다.
문막 농장에서 보내온 ‘찰옥수수 한 상자’이다.
매년 문제(?)의 특산물을 보내 주는 주인공들은 필자와 함께 늙어가는 C교수와 H교수이다.
본인들은 필자의 제자 입장에서 스승을 대접하는 의미로 철따라 선물을 보내준다곤 하지만, 아시다시피 필자는 정년을 지난 ‘퇴물(?) 전직교수’에 불과한데, 이 두 사람은 필자를 아직도 스승 대접을 하고 있으니 부담스럽기도 하다. 일순간 ‘보내지 말라고 연락할까?’ 하다가도, 이마저 안 받으면 필자가 더 초라해 보이지 않을까도 걱정이 되어, 그냥 문자로 ‘감사 인사’만 보냈다.
개원하던 치과를 접고, 2004년도 봄부터 상급종합병원에서 ‘예방치과’ 간판을 걸고 ‘치과임상교수’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법적으로는 ‘전속지도전문의’라고 불리웠던 것 같다. 치과 센터의 다른 과에 근무하던 선배들이 골프도 치지 않던 필자가 제일 한가해 보였는지, ‘치과위생과 학생 실습 담당교수’를 맡으라고 했다.
‘돈’이 생기는 자리도 아니고, 실습 학생들의 ‘애환’과 그간의 ‘인과응보’로 담당 학교의 지도교수로부터의 ‘항의’를 받아야 하는 자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필자에게 ‘출강’을 부탁했던 학교의 교수들은 차마 그러지 못했지만, 인맥상 연관성이 적은 대학의 실습 담당 교수들의 항의는 거의 ‘고발 직전’인 사항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객관적으로 실습생 관련 안건들을 정리하여 일단 수습할 수 있는 선으로 마무리짓고, 나름 ‘수도권 최고의 실습학생 수련치과병원으로 성장시킨다는 목표’를 세우고, 근무하던 상급종합병원에 실습학생들의 요청사항 여러가지를 건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연히 당시 치과과장님과의 격론과 병원 행정 담당자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은 예방치과 교수에게는 마치 일제 식민지 시절에 항일 운동을 하는 독립 투사의 마음가짐으로 하면 되는 일이라 솔직히 힘든 일은 아니었다고 회상이 된다.
문제는 치과 내부에서 일어나는 불만의 목소리를 무시한 것이 필자의 실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에는 수련을 시키려고 선발한 수련의들이 직접 석션(suction)을 잡고 선배들의 진료를 돕는 진료 보조업무가 흔해, 실습학생들이 치과수련병원에 파견을 오면, 이를 가장 반기는 사람들이 수련의들과 기존의 근무 인력인 간호조무사와 몇 안 되는 치과위생사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예방치과를 전공한 필자의 입장에서는 학생들을 5개 과에 골고루 분포시켜 다양한 분야를 소개하면서 장차의 진로에 도움을 주고자 했던 것 같고, 조금 힘들고 바쁜 과가 있다면 조금 편히 쉬어가는 과도 있다는 인상을 주고자 했다.
그러나 전체 치과 입장에서는 돈 잘 벌거나 바쁜 과에 학생들을 다수 배치해야 한다는 의견이 강력하여, 결과적으로 서로 부딪힐 수 밖에 없었지만, 당시로서는 일단 필자가 해당 업무에 전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필자가 가진 힘을 과용하여 나름대로의 공평한(?) 실습을 시켰던 것 같았다.
어느 해 겨울로 접어드는 시기에, 협소했던 치과를 조금 넓어진 별관 건물로 이전하는 이사 작업을 하는 도중에, 직원들이 치과의국 구석에 필자에게 온 소포 같은 게 있는데, 조금 수상하다(?)고 말을 전해 주었다. 유심히 보니 강원도에 근무하는 교수들이 매년 보내주었던 옥수수 포대가 소포로 포장되어 있었다.
치과에 도착해서 경과한 시간이 한 계절은 지났는지 일부는 상하고, 일부에서는 싹이 나기 시작했다. 그간의 사정이 예상은 되었지만, 그래도 궁금하여 알아보니, 직원들 중 한 명이 필자를 싫어했던 감정이 지나쳤는지 우편물이 왔다는 알림도 필자에게 주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 후의 어느 의국원도 필자에게 온 소포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으면서 수개월이 지난 것이다. 상황 파악이 끝나고 일단 보내 주신 교수들께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싹이 난 옥수수를 차에 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이 교차했던 것 같다.
집사람은 깜짝 놀라면서, 제대로 전달되었다면 발생가능했을 법한 아내 본인의 많은 할 일을 줄여준 의국원들 중 한 명에게 오히려 감사하다고 쓴웃음을 지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로부터 며칠간은 보내주신 교수들의 정성을 되새기면서, 싹이 나기 시작한 포대에서 골라낼 수 있었던 옥수수 알갱이들로 옥수수밥을 해 먹으며 참 많은 생각을 했었다.
오늘 문득 그 기억을 떠올리며 옥수수 껍질을 벗겨내었다. 한 상자에 옥수수 50개 정도가 들어가나보다고 생각도 하고, 간혹 애벌레가 발견되는 걸 보니, 유기농(?)인 것도 같고, 외손자 돌보고 와서 힘들어하는 아내에게 부담되지 않도록 청소와 분리수거도 미리 다 해 놓고 아내를 맞이했더니, 아내도 옷이 벗겨진(?) 옥수수들을 보면서 할 말이 없는지, “수고했습니다.”라고 웃으면서 옥수수들을 찌기 위한 들통을 찾아 들고 나왔다.
옥수수 껍질 하나 벗기면서 별별 생각을 다 해보았다. ‘그때 그리했던 것이 잘한 행동이었나?’라든가, ‘그 때 직원들의 편을 들어 실습생들을 바쁘게 실습시킬 걸 그랬나?’라든가 하는 쓸데없는 망상들이, 소나기를 예고하는 먹구름과 함께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다시 시계를 돌려도 아마도 필자는 똑같이 했을 것이다.
그게 ‘합당한 처사였다.’고 지금도 ‘고집스럽게’ 잘못된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에 찐 옥수수 몇 개 싸 달라고 아내에게 부탁했다. 함께 근무하는 직원들 맛보라고 갖고 가려 한다고 말 끝을 흐렸다.
아내가 웃으면서 묻는다. “당신 마음을 그 분들은 알아주나요?”라는 물음에 필자는 속으로 대답했다.
“아니오, 당신만 알아주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