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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형 원장의 오늘] 헬베티카! 산세리프의 시대에 저항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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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형 원장의 오늘] 헬베티카! 산세리프의 시대에 저항하며
  • 이수형 원장
  • 승인 2022.06.16 09: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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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오랜만에 페이스북에 접속해 내가 좋아하는 선배가 올린 질문 글을 봤다. 이번에 출판할 저서의 글자체, 즉 폰트를 어떻게 할지 의견을 구하는 글이었다.

특히 본문까지 고딕체로 할지, 명조체로 할지 등을 가독성 때문에 고민중이셨나보다(폰트 이름들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1면의 타이틀이 고딕체 계열이고, 본문이 명조체 계열이다).

아무튼 예시로 올린 고딕체와 명조체의 두가지 가편집본까지 보니 내 눈에는 명조체가 나아 보여 ‘명조체에 한 표!’라고 쓰려다 뭔가 주저된다. 올드한 궁서체, 명조체를 좋아하는 ‘디자인 감각 없는 옛사람’이 돼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자기검열의 압박이다. 
 

요즘 폰트의 대세는 누가 뭐라고 해도 산세리프 계열의 글자체가 장악한지 오래다. 산세리프가 무엇인가. 산세리프(Sans-serif)는 직역하면, ‘serif가 없는’이라는 뜻이 된다. 획의 삐침이나 꾸밈이 없는 심플한 글자체들을 말한다. 한글에서는 궁서체와 명조체에서 삐침을 뺀 고딕체가 해당되겠고, 영어 계열에서는 고딕, 헬베티카와 같은 폰트가 유명하다. 

산세리프의 인기에 대해서는 처음 등장했던 19세기나 확고히 자리잡게 해준 모더니즘의 시대상을 언급할 것도 없다. 현재 21세기에도 산세리프의 인기는 여전히 고공비행 중이다.

수많은 자본과 디자이너를 브랜드 가꾸기에 갈아 넣는 세계 굴지의 회사들이 자신들의 로고를 산세리프로 바꾸고 있는 중이다. 디올, 아르마니, 에르메스, 구치, 페라가모, 불가리 등등의 명품 브랜드를 필두로, 구글이나 폴 바셋 같은 대중지향의 브랜드까지 가리지 않는다. 

이러한 인기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분석이 있다. 구글의 경우 자사 로고가 잡아먹는 데이터의 양이 획기적으로 줄어 로딩에 큰 이점이 있다고 밝혔다. 모바일 시대에 작은 화면에서는 세리프를 비롯한 온갖 디테일들이 잘 보이지 않고 어필되지 않는다는 분석도 있다.

그런가 하면, 디자이너의 도구적인 관점에서 주로 사용하는 애플이 산세리프 계열에 특화돼 그게 예뻐 보인다고 다들 인식하는 것 같다는 의견도 있다. 

온갖 군더더기를 빼버린 만큼, 확실히 모던하고 깔끔하며, 명료하고 고급지다. 하지만 이제는 다들 너무나 많이 사용해서 좀 지겨워진 걸까, 개인적으로는 군더더기와 잉여가 주는 그 느낌이 자꾸 생각나고 그립기까지 하다. 산세리프로는 부족하다고 할까.

모든 것을 산세리프로 만들면서 깎아내고 잘라버린 바로 그 부분들이 사실은 플러스 알파의 감성을 담당하던 부분이기도 하다.

디올에서의 그 삐침은 여성스러움을 전해주던 디올 만의 특색이었고, 페레가모의 옛 폰트는 이태리 감성이 물씬했다. 각 브랜드에서의 헤리티지를 담당하고 클래식이었던 포인트가 산세리프로 다 묻혀버리는 게 아닐까. 

군더더기와 잉여에 대한 호의적인 시각을 위해서는 진화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의 관점을 소개하는 게 확실할 듯 하다. 굴드는 엉성함과 중복이 진화의 단초가 된다며, 생물체의 진화의 역사에서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할 때 구석에 남아있던 자원을 활용하는 경우가 매우 많음을 많은 에세이를 통해 강조했었다. 

손목에 잠들어 있던 종자골(sesamoid)을 활용해 추가적인 손가락을 만들어낸 판다의 엄지가 제일 유명한 사례 중에 하나일 테지만, 이 글을 읽는 우리 치과의사들은 익히 알고 있다. 현재 우리가 임플란트를 심을 수 있는 것은, 뼈도 하나 제대로 없던 무악어류 시절의 조상에게 하악의 기원이 되는 아가미궁이 남아돌았기 때문인 것을. 

굴드는 일본의 한 회사에 컨설팅을 하면서 기업체를 비롯한 집단에서 지나친 슬림화, 효율화가 오히려 창의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며 잉여에 대한 관점을 달리할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굴드와 진화론을 애정 하는 필자는 그저 방만한 병원 경영에 대한 변명으로 이를 활용하고 있을 따름이지만, 잘 활용할 수 있는 이에게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야기가 조금 옆길로 샜다. 다시 폰트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 글의 본문은 ‘조선일보 명조체’이다. 조선일보의 정치적 호불호를 떠나 굴지의 신문사에서 공들여서 만든 폰트다. 신문이라는 미디어 특성에 맞게 지면상에서 가독성과 신뢰성을 주기에 특화된 폰트라고 할 수 있다.

획의 꾸밈은 단순한 군더더기가 아니라 그 이상의 무엇이다. 그러니까 결론은 다음과 같다.

‘선배님, 명조체로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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