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컬의 임진년은 투쟁의 한 해로 정리된다. 어떤 이는 왜란이 터졌던 임진년의 기운 탓이라는 농 섞인 진단을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 상황에서 의사가 더 이상 선택 받은 직업이 아니라는 사실을 냉정하게 자각하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래서인가, 의사들은 회장 선거에서 저항하는 리더를 선택했고, 투쟁을 선언했으며, 결국 거리로 나서기까지 했다. 특히 총선과 대선이라는 양대 선거를 치르면서 현실정치에 깊숙이 개입, 대선에서는 여야 후보를 각각 지지해 결국 양쪽 모두를 지지하는 모양새를 갖추는 노련미를 보이기도 했다. 메디컬의 한 해를 7대 뉴스로 정리한다. <편집자 주>
1958년 처음 도입된 인턴 제도를 54년 만에 없애기 위한 작업이 진행됐지만 결국 입법예고 등 가시적인 결과는 없었다. 인턴제 폐지는 현재의 인턴이 대부분 병원에서 잡무를 담당하고 있는데다 하나의 과에 소속되지 않아 책임 있는 수련이 어렵다는 지적에 따라 시도됐다.
그러나 의대 졸업 후 곧바로 과를 정해 레지던트를 시작하면 응급실이나 다른 과의 분위기를 체득할 수 있는 기회가 원천적으로 차단된다는 시각도 있다. 의협이 낸 한 보고서는 인턴제 폐지 후에도 이런 순기능이 유지될 수 있도록, 진료과와 개인의 필요에 따라 다른 과 파견 수련이 가능토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공의 수련제도에서 인턴제가 폐지될 경우 해결해야 할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병원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현재 인턴이 맡고 있는 ‘잡무’를 누가 할지가 가장 큰 문제.
의료계는 인턴제를 폐지하는 대신 NR1(New Resident 1) 제도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의사국시에 합격한 인턴 지원자들을 레지던트로 전환하고, 기존 레지던트 1년차와 구분해 한시적으로 5년 동안 수련을 받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시’ 이후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정리된 바 없다.
2 한국 의료계, Change를 선택하다
2008년 57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버락 오바마 후보는 ‘Change’를 선거 구호로 내세워 매케인을 누르고 당선됐다. 오바마의 승리 이후 Change는 변화와 개혁을 원하는 세계 각계의 화두가 됐다. 한국의 의사 사회도 그 화두를 받아들였을까?
이번 선거에는 의협 대의원 224명을 포함해 회원 30인 당 1인으로 직접 선출한 선거인단 1574명 중 1430명이 투표에 참여, 90.9%의 투표율을 기록했고, 노 후보가 1차 투표에서 60%에 육박하는 득표율로 결선투표 없이 회장에 당선됐다.
애초 의료계에서는 노환규 후보의 약진을 점치기는 했으나 1차 투표에서 과반을 획득할 것이라는 전망은 누구도 하지 못했다. 더구나 이번 선거에서는 의료계 선거의 고질로 여겨지던 학연도 통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3명의 후보가 연세대 출신임에 따라 타 대학 출신 후보가 상대적으로 이익을 보지 않겠느냐는 전망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망은 보기 좋게 빗나갔으며, 의사들은 ‘변화’를 내세운 노환규 후보를 선택했다.
3 총선 새누리당 승리
4월 11일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는 새누리당이 전체 의석 300개 가운데 152개를 차지해 승리했다. 민주통합당은 127석을 차지해 의미 있는 제2당의 자리를 지켰으며, 통합진보당은 13석, 자유선진당이 5석을 각각 차지했다.
의료계는 각 정당의 총선 공약을 분석하며 지지정당을 가늠했다. 각 정당은 총선을 앞두고 노인틀니 건강보험 급여 확대와 무상의료를 비롯한 혁신적 공약을 발표했다. 정당들이 한 목소리로 무상의료 등을 내세우며 유권자의 표심 얻기에 안간힘을 쏟았지만 상대 당에서는 이를 두고 서로 거짓 공약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현실을 외면하고 무작정 공약으로 내세우기만 하는 ‘복지 포퓰리즘’에 대한 우려가 깊어지기까지 했다.
승리한 새누리당은 의료관련 공약으로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를 내걸었다. 노인틀니는 올해 75세 이상 노인에 대한 급여를 시작으로 내년에는 부분틀니까지 확대한다는 것이고, 예방 차원이 아닌, 실제 질병 치료를 위한 경우 치석제거도 보험으로 급여한다고 약속해 승리를 거머쥐었다.
정부가 7개 질병군에 대한 포괄수가제 강제적용을 7월로 예고한 가운데 노환규 대한의사협회 집행부가 전면 거부를 결의하고 나섰다.
의협은 5월 9일 20개 과별 개원의사회장단 긴급 연석회의를 열어 이같이 결의하고, 포괄수가제와 관련된 대정부 논의 창구를 의협으로 단일화해 과목별 개별 접촉은 하지도, 인정하지도 않기로 했다. 이어 12일에는 집행부와 16개 시도지부장 연석회의를 열어 이러한 원칙을 재확인했다.
의협은 결국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도 탈퇴했다. 5월 24일 오후 2시부터 열린 건정심 제 13차 회의에 의협 대표로 참석한 유승모 보험이사와 윤용선 보험·의무 전문위원이 ‘회의 참여 거부’를 밝히고 회의장을 나와 버린 것.
의협은 탈퇴 선언문에서 “건정심은 요양급여 기준, 보험료율 등을 의결하는 건강보험 관련 최고 의결기구로서 의료소비자와 공급자, 공익단체가 8인씩 총 24명의 위원으로 구성돼 당사자들의 원만한 협의를 거쳐 사안을 결정하도록 돼 있다”며 “그러나 지금까지 건정심은 본래의 취지대로 운영되지 못하고 정부가 전문가 단체의 목소리를 합법적으로 묵살하는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고 비난했다.
5 의사들, 결국 거리로
의사를 옥죄는 일련의 의료법 개정이 결국 의료계의 궐기를 불러왔다. 의협은 9월 13일 오후 3시부터 서울역광장에서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국민건강 위협하는 의료악법 규탄대회’를 개최했다.
의료계의 대규모 장외집회는 2007년 2월 과천 정부청사 앞에서 3만 여명이 모였던 ‘의료법 개악 저지를 위한 전국회원 궐기대회’ 이후 5년 만이다.
이번 규탄대회는 포괄수가제 강제·확대 시행과 전문의의 응급실 당직을 의무화한 응급의료법 개정, 성범죄 의사에게 형량과 무관하게 10년간 면허를 박탈토록 한 일명 도가니법 등 의료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시행된 제도로 인해 열렸다.
의료기관 내에 환자의 권리·의무가 적힌 액자 크기 형태 게시물을 부착하도록 의무화한 의료법 시행규칙 개정안(일명 액자법)도 의사의 자율에 맡길 문제를 과태료까지 부과하며 강제하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다는 반발이 컸다.
6 적정 의사 수 논란 재 점화
우리나라 의사 수가 적정한가에 대한 해묵은 논란이 다시 점화됐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9월 13일 ‘건강보장 미래발전을 위한 의료인력 적정화 방안’을 주제로 개최한 토론회가 시발점의 하나.
이날 정형선 연세대 교수가 발제를 맡아 의사인력 수급 현황과 문제, 적정의료 인력 수준 등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했으며, 발제자나 토론자 모두 의사 수가 20% 적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정 교수는 특히 “한의사를 포함하더라도 의사 수는 2009년 현재 1.9명이어서 의사인력은 현재 수요에 비해 20%부족하며 향후에는 더욱 부족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에 대해 의료계는 “당사자인 의사가 견해를 밝힐 기회조차 주지 않은 반쪽 토론”이라고 평가절하하고 2030년엔 의사 인력이 넘칠 것이라는 의견을 보였다.
의협은 의료 인력 양성에 소요되는 시간도 문제라며, 지금 당장 의대 정원을 늘린다고 해서 내년에 의료 인력이 늘어나는 시스템이 아니며, 현재의 절대적인 의사수가 OECD에 비해 낮다는 이유로 무조건 의대정원과 의사 수를 늘릴 수 없다고 반박해 논란이 계속됐다.
12월 19일 제18대 대통령을 뽑는 잔치가 열렸다. 최근 정부와 보건의료정책 개선을 위한 협의를 진행하면서 ‘의-정 상시합의체’ 구성에 합의한 의료계는 대선 호재를 더 크게 활용하기 위해 ‘의사의 정치세력화’를 기치로 워크숍을 개최하는 한편, 여야 각 후보에 대한 지지를 공식 선언하는 등 활발한 행보를 펼쳤다.
의료계의 이러한 행보에 대해 ‘점잖은’ 의사가 현실정치에 자신들의 의사를 분명히 개진한 것 자체가 개혁을 시작한 것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대선을 앞두고 의협은 12월 8일 서울 그랜드힐튼 컨벤션홀에서 100여명의 정책자문단이 참석한 가운데 워크숍을 열어 의사의 정치세력화에 적극 나섰다.
또한 여야 각각의 후보에 대해 의사들은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지지를 표명하고 나섰다. 의협 전 부회장을 비롯한 1219명이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후보에 대한 지지를 먼저 선언했고, 서울시의사회장 등 7070명의 의사로 구성된 ‘미래의사포럼’은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여야 모두에 지지하는 의사를 표명함으로써 양쪽 모두를 보듬는 전략을 연출했다는 평이다.
결국 여당 후보의 당선으로 의료계는 건정심 구조개편과 같은 굵직한 사안에 대해 자신들의 ‘지분’을 주장할 수 있게 됐으며, 향후 정부와의 협상에서도 일정 부분 유리한 고지를 점한 것으로 분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