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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웃는 얼굴’ 뒤 눈물로 ‘속앓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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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웃는 얼굴’ 뒤 눈물로 ‘속앓이’
  • 정동훈기자
  • 승인 2014.05.15 09: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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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 스탭 감정노동 심각 … 폭언과 성적 농담에도 감정 드러내지 못해 곤욕


치과에서 접수와 수납 업무를 담당하는 K스탭은 병원이 ‘전쟁터’처럼 느껴진다. 환자에게 욕설을 듣지 않거나 삿대질을 받아보지 않는 날이 손에 꼽힌다.

치료비가 비싸게 나왔다며 고성을 지르는가 하면 “요새 무료 주차가 안되는 병원이 어디있냐”며 소리를 지른다. 그럴 때마다 K스탭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죄송합니다’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다.

가면성 우울증 앓는 스탭들

K스탭처럼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고객을 대해야 하는 ‘감정노동자’들은 속병을 앓고 있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며 고객과 직접 대면하는 전화상담원과 항공기 승무원, 판매원 등이 대표적 감정노동자로 꼽힌다.
실제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는 무관하게 직무를 행해야 하는 감정적 노동은 앨리 러셀 혹실드의 <관리된 심장(The Managed Heart)(1983)에서 처음 등장했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우울함이 오래 지속되는 상태는 감정노동자의 대다수가 시달리는 증상이다. 우울한 기분이 마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의학 용어로 ‘가면성 우울증(Masked depression)’이라고도 불린다.

치과 스탭들 또한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항상 기쁨이나 공손함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을 표출하고, 예의 바른 언어와 행동을 보여주기 위해 실제 감정을 숨기는 경우가 다반사다.

지난 2010년 전국보건의료노동조합이 의료 노동자 2만 156명을 대상으로 처음 감정노동과 관련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교환원, 치과위생사, 간병인, 간호사 순으로 감정노동 정도가 높았다.

불쾌한 언행에 대한 설문 항목에서는 폭언과 폭행, 성희롱 등 불쾌한 경험한 대상자가 62%였으며, 가해자의 40%가 환자 및 보호자, 의사가 20%, 동료가 7.9%였다. 

감정노동의 경험은 업무 수행에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반복 또는 지속적이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에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과실, 결근, 이직을 초래하기도 한다. 

스탭들의 가장 큰 고충은 이른바 ‘진상(진짜 밉상의 준말)’ 환자에게서 발생한다. 말도 안 되는 요구는 기본. 정중한 답변에도 ‘원장 불러오라’고 막무가내로 소리칠 때의 난감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 정도는 양반이다.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폭언이나 욕설이 오가는 경우도 다반사다. 심지어는 성희롱성 발언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인증·교육 늘면서 스트레스 가중

C스탭은 “환자를 대할 때면 자신의 감정은 뒷전이다. 무리한 요구에도 싫은 내색을 하기는 쉽지 않다. 치과 대기실에서 신문을 찾던 한 환자가 대한민국의 넘버원 신문이 없다며 난리를 피우는 경우도 있었다”며 “왜 오늘은 화장을 짙게 하고 왔냐고 삿대질을 하는 환자도 있다”고 토로했다.

이처럼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참아야 하는 데다 폭언과 성희롱에 무방비로 노출되다 보니 스탭들은 늘 스트레스를 호소한다.

올해부터 시작되는 치과병원 인증제 준비도 직원들의 감정노동 스트레스를 가중시키는 요인이 됐다.

병원 내부에서 인증제 준비 및 교육이 늘면서 스탭들의 ‘대기 전 자세, 인사, 환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 등을 평가한다. 평가 결과는 바로 점수화돼 그날 회의에서 공개되고 이 점수가 업무능력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직원들은 한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점수가 공개되는 것도 부담이지만 점수가 벌칙으로 이어진다는 것도 큰 문제다.

일부 팀장 등 실무 관리자들은 점수가 낮게 나온 스탭들을 그야말로 들들 볶는다. 수십 명을 세워놓고 그 자리에서 인사를 시키거나 휴일에 극기훈련을 진행하기도 한다.

감정 노동이 극대화되면 정신 건강의 악화로 병원을 그만두거나, 우울증으로 인한 의욕 및 사고기능 저하로 업무 효율이 떨어지는 등 조직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한 스탭은 “감정 노동으로 과중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다음날 출근 안하는 식으로 그만두는 사람도 상당수”라고 말했다.

지난해 6월 30일 서울 남부지법에서는 고객의 부당한 항의로 우울증을 호소하며 퇴사한 SK텔레콤 서비스센터 전 직원에게 회사가 위자료 73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감정노동자에 대한 정신적 피해 보상 의무를 재판부가 처음으로 인정했지만 감정노동자들의 권리를 찾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한 사람이 무조건적으로 감정을 파는 것이 아닌, 병원, 직원, 환자 간 감정의 상생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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