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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호 원장의 역사이야기(2)] 미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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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호 원장의 역사이야기(2)] 미실1
  • 안승호 원장
  • 승인 2013.03.14 1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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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하되 임 앞에 불지 말고, 물결이 친다 하되 임 앞에 치지 말고, 빨리빨리 돌아오라 다시 만나 안고 보고, 아아, 임이여 잡은 손을 차마 물리치려뇨.

미실이 사다함을 전장터로 보내며 쓴 송시(送詩) 향가(鄕歌)입니다. 미실은 시(향가)를 700여 수 남겼다고 해요. 미실은 사다함을 깊이 사랑하였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어요. 미실과 사다함은 열렬히 사랑하였고 죽은 후에 같은 구멍(동혈; 同穴之盟)에 묻히기를 맹세합니다. 이것은 당시 신라 사회에서 가장 깊은 사랑을 표현하는 기법(유행어)인 듯해요.

 

미실은 왕의 동생 세종과 결혼하고 살았으나 지소태후(왕과 세종의 어머니, 미실의 시어머니)에 의하여 쫓겨났어요. 궁에서 쫓겨난 미실은 졸지에 어린 과부가 되었지만 아름다운 청년 화랑 사다함을 만나게 되었어요.
 
사다함은 자신보다 나이가 조금 많기는 하지만 이 가여린 여인을 사랑하였어요. 사다함은 17세였지만 귀족 가문이였고 그를 흠모하는 사람이 많아 풍월주(화랑의 대장) 자리에 있었어요. 진흥왕 23년 신라 정부는 가야를 정벌하면서 화랑 측에게 도움을 청했고 사다함은 화랑도를 이끌고 전장에 나갔습니다.

사다함은 전장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우고 서라벌로 귀환하였고 신라 정부로부터 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사다함은 가야인 포로 중 3백 명을 노비로 받았지만 모두 양민으로 풀어줍니다. 신라 정부는 사다함에게 서라벌 한 복판 노른자위 땅을 주지만 사다함은 받지 않습니다. 사다함은 정부에서 준 황량한 들판을 받아 가야 출신 사람들에게 개간하여 살도록 줍니다.

전장터에서 돌아온 사다함은 미실이 궁으로 불리어 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미실의 전 남편 세종이 미실을 그리워하다가 그만 병에 걸리자 지소태후도 어쩔 수 없어 미실을 궁으로 부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인이 남의 아내가 되어 버린 믿을 수 없는 현실이였습니다.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나의 콩밭에 머무는가, 파랑새야 파랑새야 나의 콩밭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다시 날아들어 구름 위로 가는가, 이미 왔으면 가지 말지 또 갈 것을 어찌 왔는가, 부질없이 눈물짓게 하며 창자가 문드러져 말라 죽게 하는가, 나는 죽어 무슨 귀신이 될까 나는 죽어 신병이 되리, 날아들어 호신 되어, 매일 아침 저녁 전군부처 보호하리, 만년 천년 죽지 않게 하리.

사다함의 비통한 심정이 담긴 <청조가> 라는 향가에요. 사다함은 얼마 안 있어 마음의 병이 원인이 되어 요절하니 그의 나이 17세였어요.

궁으로 들어간 미실은 세종과의 합궁을 거부합니다. 세종에게 본 마누라가 있어 싫다고 한 것이였어요. 걍 마음도 심란하고 하여 거절한 명분이였겠죠. 세종은 본 마누라를 내쫓고 미실을 제 1 부인으로 삼습니다.
세종의 정부인이 된 미실은 사다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미실은 세종에게 ‘사다함이 나를 사모하다가 죽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천주사에서 사다함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미실이 궁에서 쫓겨난 것, 또 강제로 사다함과 헤어진 것 등은 권력 다툼 속에서 미실 측이 힘이 약해졌기 때문에 생긴 사건이였어요. 미실의 시어머니 지소태후는 <진골정통>이였고 미실은 <대원신통>이였어요. 두 세력은 왕을 사이에 두고 다투는 여인 집단이였어요. 이 두 모계집단은 왕에게 색공을 제공하면서 왕자를 생산하고 왕통을 이어가는 왕족이였습니다. 왕은 김씨들이 하는 거에요. 그러나 왕비는 <대원신통>이나 <진골정통>에서만이 나오는 거에요. 왕은 이 두 집단 중에서 한 명을 골라 왕비로 삼아야 합니다. 이 두 집단은 모계 혈통만을 따집니다.

이들에게 남자는 그 당대에 한해서만 모계혈통으로 인정됩니다.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은 얽히고 섥힌 관계 속에서 오로지 모계 혈통만을 따지면서 서로 경쟁하고 권력다툼을 벌립니다. 이 두 모계 집단에 대한 이해 없이는 신라 사회와 역사를 이해할 수 없어요. 남성 중심의 사고 속에 갇혀있는 우리가 이 모계 중심의 두 집단을 이해하려면 그동안의 사고를 벗어나야 가능합니다.

어느 왕 때는 <대원신통>계의 왕비가 나오고 어떤 때에는 <진골정통>계에서 왕비가 나오는 거에요. 그러나 <대원신통>에서 왕비가 나왔다고 해서 <대원신통>이 실권을 쥐는 것만은 아니에요. 왜냐면 태후(왕의 어머니)가 누구(어느 계)냐가 또 권력의 향방을 좌우하니까요.

대체로 태후가 실권을 쥐고 있는 경향이 많았어요. 진흥왕의 경우 7세에 왕이 되었다면 태후는 섭정을 하게 되니까 당연히 태후가 실세가 돼고, 진흥왕이 친정을 한다고 해도 태후를 마구 무시할 수는 없는 이치죠. 진흥왕 때는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태후가 실권을 쥐고 있었어요. 지소태후는 본 남편 말고도 몇 명의 애인이 있었어요. 그 애인 중에 울릉도를 정벌한 것을 유명한 이사부 장군도 있었어요. 물론 이사부 장군에게는 본처가 있었어요. 지소태후와 이사부 장군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세종이에요. 진흥왕과는 동복이부 형제죠.

이렇게 같은 배에서 태어난 형제를 동포同胞라고 합니다. 이 지소태후가 <진골정통>이였으므로 <진골정통>이 신라 궁내(내명부라 해야할까)의 실권을 쥐고 있었죠. 진흥왕의 부인(왕비)은 <대원신통>계이였으므로 별 힘을 쓰지 못했어요, 진골정통이 궁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으니까요. 워낙이 지소태후의 <진골정통> 힘이 쎘기 때문에 <대원신통> 측은 와신상담하고 있었어요.

미실이 궁에서 쫓겨난 이유와 다시 궁으로 불리어 가게 되는 과정...

지소태후는 아들 세종에게 마음에 드는 여자를 궁내에서 고르라고 했어요. 세종은 미실을 선택했어요. 그러나 지소태후는 미실이 <대원신통>계 였으므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들의 선택을 존중하느라 참았어요. 세종과 합궁한 미실은 화려한 섹스 테크닉으로 세종을 거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만들어 놨습니다.

미실은 <대원신통>계의 재원이였고 희망이였어요. 타고난 미모에 뛰어난 두뇌 그리고 어릴 적부터 외할머니(옥진)에 의한 방중술의 기교와 남자의 마음을 놓치지 않는 테크닉을 훈련 받았거든요. 미실의 외할머니(옥진)는 한 때 법흥왕의 총애를 받던 고수였었어요. 옥진은 법흥왕의 딸이자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태후<진골정통>에게 밀려났지만 예전에는 <대원신통>의 리더로서 법흥왕의 총애를 바탕으로 권력을 장악했었었죠.

미실은 그의 첫 플레이 대상 남자였던 세종에게 거침없이 테크닉을 발휘하여 세종의 몸과 마음을 완전히 제압하였어요. <진골정통>의 지소태후는 미실의 뛰어남을 두려워하여 궁에서 내쫓았던 거죠. 과도한 방중술과 기교로 아들 몸을 상하게 한 미실이 미웠겠죠, 거기다가 <대원신통>이였으니. 미실의 미모 섹스 테크닉 학식 똑똑함 등이 탁월하였으니까 지소태후는 <대원신통>의 부흥이 두려웠을 거에요.

궁에서 쫓겨났다가 사다함과 진정한 사랑을 하게 된 미실은 다시 한 번 권력에 의하여 사다함과 헤어지고 궁으로 불리어 가게 되면서 권력의 중요함을 실감하게 됩니다. <화랑세기>에 이르기를 미실은 용모가 절묘하고 풍만함이 옥진을 닮았고 명랑함은 벽화를 닮았고 아름다움은 오도를 닮아서 백가지 꽃의 영검함이 뭉쳐 있고, 세가지 아름다움의 정기를 모았다고 할 수 있다. 옥진, 벽화, 오도는 <대원신통>계의 여인들로 한 때 잘나갔던 사람들이에요.

<진골정통>에 밀려 인생 초반부터 씁쓸함을 느낀 미실이 이제 다시 궁으로 들어가서 어떻게 <대원신통>을 다시 세우는 지, 미실이 권력을 장악해 나가는 과정을 살펴보도록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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