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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프리 산문집 이 세상에서 가장 긴 시간] 빛의 세계, 어둠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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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프리 산문집 이 세상에서 가장 긴 시간] 빛의 세계, 어둠의 세계
  • 차현인 원장
  • 승인 2015.06.18 09: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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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인(여의도 백상치과) 원장

 


“아무래도 녹내장기가 있으신 거 같아요. 큰 병원에 가셔서 정밀검사를 받으셔야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건 몇 년 전의 일이다. 눈에 잡티가 자꾸 보여서 난생 처음 받아본 안과검사에서 이런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세상에 녹내장이라니! 서서히 시야가 좁아져서 실명에 이르는 그 불치병이 나에게? 설마?

다만 좀 위안이 되는 것은 안압이 정상이라는 것과 약을 죽을 때까지 잘만 쓰면 악화 속도를 최대한 늦춰서 완전 실명만은 피할 수는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서둘러 안과전문 병원에 예약을 했고 녹내장에 대한 온갖 자료를 여기저기 뒤져서 읽고 또 읽고 했다. 정밀 검사를 받고 그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은 너무 초조하고 걱정이 되어서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어찌 보면 그 시간은 내 인생에 대해서 다시금 실존적으로 사색하게 하는 강압적 철학교실이었다. 앞을 못 보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듯 싶었다.

"앞을 못본다면 매일아침 나를 맞이하는 출근길의 푸르름은 더이상 나의것이 아닐것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드는 상상은 ‘내가 장님이 될 경우, 무엇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하나? 누구에게 의존해야 하나?’ 등등의 기초적인 생존의 문제도 문제이지만 ‘여지껏 눈을 통해서 누려왔던 즐거움을 다 잃는다면 뭘로 즐거움을 취하며 세월을 보낼 것인가’라는 다소 고차원적인 문제도 나름 큰 고민거리였다.

‘귀는 멀쩡하니 음악을 미리 공부해서 음악의 세계나 추구해볼까?’하는 생각도 그럴 듯했다.

그러다가 퍼뜩 떠오른 더 좋은 아이디어 하나는 ‘맹인용 점자를 정상적으로 볼 수 있을 때 미리 마스터 해 놓으면 눈이 안보여도 즉시 책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였다. 그 때부터 나는 인터넷에서 점자에 대한 콘텐츠를 검색해서 공부할 채비를 하였고, 심지어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해 층별 버튼대에 설치해놓은 오돌도돌한 점자 부분을 손가락 끝으로 대보며 눈을 지그시 감아보는 ‘점자체험(?)’을 시도하기까지 하였다. 돌이켜보면 정말 웃지 못할 암울한 나날이었다.

2차에 걸친 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 담당의사는 진단소견을 말해주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환자분의 망막의 형태는 분명히 녹내장 진행 시의 모양인데요. 검진결과를 보니 기능적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네요. 게다가 안압도 지극히 정상이고요! 굉장히 드문 케이스인데 선천적으로 그런 모양을 타고 나신 것 아닌가 짐작됩니다. 현재로선 녹내장이 아닙니다.”

나도 물론 의료인이지만 나를 둘러싼 세상의 그 모든 것을 망각한 채, 그에게 큰 절을 세 번이나 하다가 무릎을 꿇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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