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발발한 이래로 한 달여가 다 넘어갈 때까지 불안과 공포가 끊이지 않고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은 안 된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하리라 여겨진다.
모두의 평범한 일상을 초토화시키는 전쟁 기간에 치과는 어려움 속에서 어떤 역할을 맡아 해냈을까? 치과와 전쟁의 세계사 중에도 역사적으로 대표적인 사건인 남북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본다.
화약통을 뜯기 위한 치아의 중요성
1861년 발발한 남북전쟁의 승자는 북부였으나 치과에 관한 의식과 실행이 더 높던 곳은 남부였다. 오하이오주립대 역사관에 따르면 남부 미연합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제퍼슨 데이비스는 미합중국 14대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 아래서 국방부장관을 역임하던 무렵 치과의사 부대의 필요성을 지지한 바 있다. 이로 말미암아 남군에는 치과 프로그램이 존재한 한편 북군에서 떠오른 유사한 아이디어는 부서에서 곧 거부돼 가라앉은 바 있다.
당시 군인들은 기본적인 구강건강 관리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던 데다 치과 수술은 일반적인 군인이 감당할 수 있는 돈보다 훨씬 높은 비용이 들었다. 거기다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인플레이션이 시작되자 그 열악함은 더 심해졌다.
하지만 남군에서 군인의 치아는 전장에서 중요한 요소로 인정받았다. 그 일화 중 하나가 신병을 모집할 때 위아래로 총 6개의 앞니가 없거나 온전하지 못한 경우 불합격 통보를 내린 것이었다. 소총과 함께 사용하던 화약통을 개봉하려면 치아를 이용해 물어뜯어야 하는데 이것이 불가능해서는 전투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군은 전쟁 중 치과의사를 징집하며 남군에게 북군보다 최소한의 이점을 획득할 수 있었다. 남북전쟁에서 남군의 치과의사 부대는 턱 골절을 교정하고 구강내 부상을 수술하는 것 외에도 치아를 연결하거나 발치하거나 세척하는 임무도 도맡았다. 특히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치과의사 Dr. James B. Bean은 골절된 상악골 치료에 상당히 기여하며 해당 임상에서 선구자 격이 되기도 했다.
전쟁 중 고통을 줄여준 치과의사들
웹사이트 Concordia Memory Project에서 Sean Zimny는 제2차 세계대전이 펼쳐진 전장에서 치과의 노력 및 공로를 돌아봤다. 그는 “이 사실이 종종 인정받지 못하지만 치과 분야가 제2차 세계대전과 우리 역사 전체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주창했다.
그에 의하면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치과의사 군의관과 치과 분야 자체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졌다. 당시 Richard D. Shipley 대령은 “전쟁에서 치과의 임무는 구강 건강과 기능을 회복하고 유지하며 전투력을 보존하는 것”이라 주장하며 전시는 물론 평시에도 군인들이 최적의 구강 건강을 유지하고 배치할 준비가 되도록 포괄적인 치과 치료를 제공하고자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치과 전문의들은 기존의 의학적 지식과 기술을 총동원해 놀라운 일들 또한 해냈다. 치과의사 Harry Blumenfeld는 병영에서 치과기공소를 운영하며 부분 또는 전체 틀니를 제작해 제공했다. 구강질환에 관한 새로운 치료법도 발전해서 이 시기에 치과 분야로 페니실린, 스트렙토트리신, 티로트리신, 스트렙토마이신과 같은 새로운 약물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Dr. J. Obst에 따르면 턱뼈에 심어 고정하는 나사 역시 이때 개발돼 구강 수술 기술이 크게 발전한 주요 계기로 대두됐다.
이렇듯 제2차 세계대전에서 치과의사들은 군인들이 전쟁 중에 고통 없이 기능하도록 도왔을 뿐만 아니라 이후 환자의 전신에 오는 합병증을 예방하는 데에도 공헌했다. 한마디로 전쟁에서 치과의사가 없었다면 열악한 위생 환경에 놓인 채 전투 전후로 너무나도 견디기 힘든 고통에 가득 휩싸여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