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레슬링과 치과] 치과의사 기믹 프로레슬러 ‘아이작 양켐’

케인의 흑역사 시절이 치과의사라고?

2021-12-16     장지원 기자

프로레슬링에는 기믹(gimmick)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영단어 기믹의 뜻은 술책이나 속임수를 뜻하나 프로레슬링에서는 본래의 자아 대신 링 위에서 발현하는 또 다른 페르소나(persona)의 특성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25년이 넘도록 현역 프로레슬러로 활약한 글렌 제이콥스(Glenn Jacobs) 또한 여러 가지 기믹을 덧쓰고서 사각 링을 누볐다. 수십 년간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으며 프로레슬링 레전드로 칭송받는 그에게도 한때의 흑역사 기믹이 있었다. 경력 초기에 활동한 치과의사 기믹 ‘아이작 양켐(Isaac Yankem D.D.S.)’이었다.

흉측한 치아를 한 채 환자 괴롭히다?
1992년 프로레슬러의 삶을 시작한 글렌 제이콥스는 1995년 드디어 WWF(World Wrestling Federation, 현 WWE) TV 방송에 처음으로 출연했다. 그러나 그가 수행한 기믹은 한마디로 끔찍했다. 

아이작 양켐은 당시 무대에서 왕 노릇을 하던 악역 제리 ‘더 킹’ 롤러(Jerry ‘The King’ Lawler)의 치과 주치의라는 설정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치과의사 하면 떠오르는 긍정적인 이미지와 정반대로 배치되는 외양에다 부정적인 뉘앙스를 극대화한 형태로 선보이며 수천 명의 현장 관중과 수백만 명의 TV 시청자에게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키 203cm, 몸무게 140kg에 달하는 거구는 차치하더라도 치과의사라고는 믿기지 않는 흉측한 치아를 가득 드러내는 외모부터 거부감을 잔뜩 느끼도록 했다. 하물며 제리 롤러의 명령에 따라 악독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체어에 몸을 맡긴 환자의 구강을 무자비하게 치료(?)하는 장면 역시 두 눈을 찌푸리게 하는 데 큰 몫을 해냈다.

무엇보다도 최악은 아이작 양켐의 테마곡이었다. 보통 프로레슬러는 선수 입장 시 자신만의 개성을 뽐내는 등장음악을 틀고 멋진 포즈를 취하며 나타난다. 그러나 아이작 양켐의 음악은 다른 의미로 온몸에 소름을 돋게 했다. 잔잔한 현악기 연주를 확 찢어버리는 강력한 핸드피스 모터 소리가 경기장 내에 가득 울리고 만 것이다. 흔히 어린이들이 떠올리는 치과의 이미지 즉 평화로운 로비 너머로 고통스럽게 울리는 진료실 소음과 다를 바 없는 배경음으로 치과에 관한 공포심만을 극도로 자극한 셈이었다. 하물며 곡명 또한 ‘Root Canal’, 말 그대로 신경치료였다.

최고의 슈퍼스타와 싸우다 사라지다?
그래도 처음에 아이작 양켐은 괴물 같은 인물로 묘사되며 WWF 스토리라인의 중심에 섰다. 제리 롤러의 오랜 숙적이자 WWF에서 최고의 인기를 달린 브렛 ‘더 히트맨’ 하트(Bret ‘The Hitman’ Hart)와 대립하며 당대 WWF 4대 이벤트 중 하나인 섬머슬램(SummerSlam)에 출전하기도 했다.

브렛 하트 대 아이작 양켐의 1995년 섬머슬램 경기에서 그는 이번에도 제리 롤러가 마이크를 잡고 과장되게 떠드는 가운데 무시무시한 핸드피스 소리를 튼 채 관중들의 야유를 한몸에 받으며 링 위에 올랐다. 경기 중에는 테크니션으로 손꼽히는 브렛 하트의 화려하고 다양한 공격을 덩치에 어울리는 둔한 움직임으로 줄곧 당하고만 있다가 막판에 브렛 하트에게 로프를 이용한 반칙 공격을 하며 실격패 처리되고 말았다.

이후에도 갈등은 이어져서 가을에는 사방이 철창으로 가둬진 스틸 케이지에서까지 맞붙었다. 제리 롤러는 경기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또 하나의 철창에 갇혀 링 위 공중에 매달린 채 싸웠고 결과는 16분여의 사투 끝에 브렛 하트가 케이지 탈출에 성공하며 아이작 양켐의 패배로 끝이 났다. 그 뒤로 치과의사 아이작 양켐은 쭉 내리막길을 걸으며 WWF에서 자취를 감췄다. 

양켐에게 치료받은 미담 전해지다?
시간이 흘러 글렌 제이콥스는 새로운 기믹을 장착하고 흑역사 청산과 더불어 완벽한 변신에 성공했다. 1997년 가을 그는 바로 언더테이커의 배다른 동생이자 ‘빅 레드 머신’ 케인(Kane)으로서 출연해 팬들에게 확실히 각인됐다.

그렇게 치과의사 기믹이라는 과거를 완전히 벗어던진 케인은 WWF 챔피언까지 오르는 커리어의 정점을 달리며 전 세계 프로레슬링 역사에 길이 남았다. 훗날 글렌 제이콥스는 프로레슬러로서 과거를 돌아보다가도 누군가가 아이작 양켐을 물어볼 때면 “그는 다른 사람이며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아이작 양켐이라는 인물은 여전히 프로레슬링계에 어딘가에 살아 있는 듯하다. 제프 하디(Jeff Hardy) 그리고 세자로(Ceraro) 등 현역 프로레슬러들이 경기 중 치아를 상실하는 부상을 당한 후에 “아이작 양켐에게 치료를 받았다”며 SNS에 치과 치료 후기를 남긴 일화가 유명하다. 아마 본인의 구강건강은 나빴을지언정 실력만큼은 나쁘지 않은 치과의사였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