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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모 원장의 마음의 창]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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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모 원장의 마음의 창] 소나무
  • 김관모 원장
  • 승인 2022.11.24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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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백두대간에 있는 산을 올라가면 동네 뒷산에 올라가서 보는 산과는 가슴에 와 닿는 감동이 다르다.

햇볕이 아름다운 날, 백두대간에 있는 희양산에 올라갔다. 가을 단풍이 아름답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또 빨갛게 잎이 변하고 있으나 모두 같은 빨간색이 아니다. 맑은 빨간색도 있고, 탁한 색도 있고, 자주색으로 물든 것도 있고, 주황색도 있다. 정말 다양한 색이다.

노란색으로 물든 잎도 모두 같은 노란색이 아니다. 연노랑도 있고, 진한 노란색도 있고, 밝은 색, 탁한 색 등 정말 다양한 색으로 물들어 있다. 그러나 오늘은 단풍에 관한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캠핑 간 사람들이 불을 피워놓고 아무 생각 없이 불을 바라보며 있는 것을 흔히 ‘불멍’이라고 하는데, 나는 999m 정상에 올라 바위에 걸터앉아 겹겹이 쌓인 산을 바라보며 ‘산멍’을 한다. 그러다 문득 정상 옆에 솟은 바위봉우리를 보았다. 그 곳에 서 있는 소나무를 보며 산수화속으로 생각이 빨려 들어갔다.

출처: 이미지투데이

정선의 ‘금강전도’나 김홍도의 ‘금강사군첩’을 보면 바위봉우리가 있고 그 위에 소나무가 그려진 그림을 보게 된다. 그리고 나는 이 자리에서 대가들의 그림 속에 있는 듯한 소나무를 감상 중이다.

대가들의 그림 속에 있는 소나무도 지금 보고 있는 것처럼 커다란 바위에 붙어 있다. 내가 보는 소나무도 흙이 거의 없는 바위에 우뚝 서 있다.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서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또한 단풍이 들어 알록달록 이파리가 변하는 나무와 다르게 솔잎은 푸른빛을 보이며 “나는 아직 건강한 청춘이요”라고 말하는 듯 같다.

산 아래쪽에 자리 잡은 소나무는 키도 크고 굵기도 정상 부위 소나무보다 굵다. 영양이 풍부한 흙에 뿌리를 내려서 인지 잘 먹고 잘 자란 듬직한 인물 같다.

그러나 정상 부위 바위에 자리 잡은 소나무는 크고 굵은 것이 별로 없다. 대부분 모진 풍파를 견디려고 이리 저리 휘어져 있다. 이 모습에서 힘들게 살아온 우리내 부모님이 겹쳐 보인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사군자는 매화·난초·국화·대나무를 말한다. 이 식물들은 시서화의 소재로 많이 사용돼왔다. 남송 말기부터 원대 초기에 몽고족의 지배 하에서 나라를 잃고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은둔 생활을 하던 문인들이 사군자를 무언의 저항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그려오기도 했다. 특히 대나무와 매화는 소나무와 더불어 ‘세한삼우(歲寒三友)’라 불리며 역시 같은 이유로 원대에 많이 그려졌다.

한국화를 비롯한 동양화는 대체로 그림 이면의 의미를 표현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한국화는 얼마나 닮게 똑같이 그렸나를 중시하기보다는, 얼마나 그 사람의 생각이나 의중을 잘 표현했나를 더 중시한다. 이를 보통 사의(寫意)라고 부른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보자. 서양미술의 기준으로 보면 이는 잘 그린 그림이 아니다. 선도 똑바르지 않고, 집 뒷부분이나 입구 방향을 봐도 틀린 원근법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당시 사대부들은 김정희의 그림을 잘 그렸다고 칭찬했는데, 이는 김정희가 유배 생활로 겪는 고통이나 상실감을 잘 표현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산 정상 암반위에서 반듯하게 자라지도 못한 채 바람에 휘어지고 영양이 부족해 크지 못한 소나무. 그런 소나무를 보고 있으면 어떤 시련이 닥쳐와도 이겨내는 강인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한 줌의 흙에서 뿌리가 나와 바위 속으로 파고들고 그 틈에서 양분을 얻어 살아가는 소나무. 이러한 소나무가 한편으로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금강송 숲에 가서 볼 수 있는 죽죽 자란 소나무도 멋있지만 이렇게 산 정상 바위틈에서 자란 소나무의 모습은 더욱 아름답다. 정녕 우리 어머니의 모습이며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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