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떤 사람을 알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을 평하며 품위가 있다 또는 없다고 생각하거나 말하게 된다.
주관적 표현이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이 비슷하게 느끼는 것을 보면 무언가 공동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 우리는 사람을 볼 때 먼저 외모를 보게 된다. 깔끔하게 차려 입으면 일단 호감을 갖게 되지만, 격식에 맞지 않게 입는다면 품위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화려한 영화제에서는 화려한 옷이 오히려 품위있게 보인다.
그러나 그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태도다. 진중해야 할 자리에서 건들건들 하거나 촐랑대면 품위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말과 생각 그리고 행동이다.
대화에 욕이 가득차고 생각이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만을 위한다면, 그것을 본 사람은 실망하고 품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끔 처음 보는 사람과 대화할 때 나의 직업을 맞춰보라고 물어 본다. 그러면 상대는 선생님, 교수님, 의사, 공무원 등 여러 가지 대답을 하는데 비교적 우호적인 대답을 듣는다.
그럴때면 내가 남에게 품위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살고 있구나 생각하며 즐거운 마음이 든다.
나는 품위 있는 삶을 살고 싶다.
하지만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령’을 따르며 높은 도덕적 품위를 갖고 살 자신은 없다.
‘정언명령’이란 행위의 결과에 구애됨이 없이 행위 그것 자체가 선(善)이기 때문에 무조건 그 수행이 요구되는 도덕적 명령을 말하는데, 이것을 지키려면 거의 성인군자나 도덕적으로 높은 품격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 나는 그렇게 살 용기와 정신 수양이 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개자식(품위 없는 사람을 지칭)처럼 살기는 싫다.
토트메이가 쓴 책 『품위 있는 삶을 위한 철학 (a decent life)』에서 알기 쉽게 설명한 부분이 있다.
“개자식과 사이코패스의 차이점은 이런 것이다.
사이코패스는 도덕적 감성이 전혀 없는 반면 개자식은 자신의 도덕적 권리를 아주 민감하게 의식한다.
개자식이 사람들을 돌아버리게 만드는 것은 ‘그가 아주 기본적이면서도 도덕적으로 중요한 방식으로 남들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개자식은 오로지 자신의 생활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들의 존재, 생활, 계획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는 자신을 우주의 중심이라 생각해서 상식적 예의를 제공하거나 인정해야 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
상식적 예의 앞에서 이처럼 무례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인정하려면 상당한 정도의 자기수용(self-acceptance)이 필요하다.
어쩌면 그런 자기 수용에 이르는 것은 가치 있는 목표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 일은 우리에게 좋은 쪽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런 사람도 살아가야 할 삶이 있고, 그 때문에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런 이기적인 삶에 몰두한다는 사람을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이전보다 한결 더 성숙해진다. 다시 말해 우리는 “더 안정적인 균형감을 획득하는 것”이다.
한 번 생각해보자.
우리의 목표가 도덕적으로 품위 있는 삶이라면 이 또한 얼마나 멋있고 즐거운 일이 아닌가.
도덕적 품위가 있는 삶을 이루기 위한 토드메이의 실천방안이 있기에 많은 독자 여러분과 공유해 보려고 한다.
1. 사람들의 얼굴을 자주 똑바로 바라보라, 특히 당신이 그들에게 화가 났을 때 더욱.
2. 동료가 잠시 자리를 비울 경우에 그들의 커피 컵을 냅킨으로 덮어주라.
3. 당신의 도덕적 행동을 최대한 즐겨라.
4. 노숙자에게 동냥을 주지 않을 것이라면 그 돈을 노숙자 지원 단체에 보내라.
5. 환경을 파괴하는 행동을 하지 말라.
6. 고양이(강아지)에게 인사하라. 가능하면 고양이(강아지) 고기를 먹지 말라.(괄호는 나의 생각)
7. 인종차별주의자, 여성혐오자, 동성애혐오자로 가는 길에서 벗어나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하라.
8. 정치적 활동을 해보라. 결국, 정치가 당신을 만든다.
9. 철학책을 즐겨 읽도록 하라. 당신이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라고 조언하는 책일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