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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윤 원장의 슬기로운 치과의사생활] 밤 하늘 별이 된 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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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윤 원장의 슬기로운 치과의사생활] 밤 하늘 별이 된 틀니
  • 김남윤 원장
  • 승인 2021.06.29 09: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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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을 마치고 공중보건의로 보건지소에 근무할 때 일이다. 지금은 만65세 이상 어르신의 틀니가 급여로 전환돼 사라졌지만, 그때는 각 지자체에서 의료소외계층을 대상으로 ‘무료 틀니 사업’을 시행했다. 완전 무료는 아니고 틀니 제작에 들어가는 비용을 보전해주는 정도였다.

첫 번째 틀니 환자로 오신 할머니는 초라한 행색과 수척한 모습에 말 수도 거의 없으셨고, 오실 때마다 입에서는 늘 술 냄새가 났다. 치과의사로서 첫 틀니라, 보철과 전공한 동기에게 이것 저것 물어보기도 하고 기공소장님을 괴롭혀 가며 나름 진료 준비를 했다.

“할머니, 오늘 점심은 드셨어? 다음부터 술 드시고 치과 오시면, 치료 안 해줄 거야~” 

요즘 환자로 보고 있는 어르신들은 내게 부모님 또래지만, 그때는 나도 어렸을 때였고, 손자가 할머니한테 투정하듯 말하면, 오히려 잘 진료에 따라와 주셨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분은 아무리 ‘집으로 가는 길’의 손주 재롱을 떨어도 무표정에 반응이 없으셨다.

“할머니, 틀니 끼시면 주름이 다 펴져서, 시집 다시 가셔도 되겠다. ‘새색시’ 한 번 해봐~

하물며, 악간관계 기록과 수직고경 측정을 위해 Occlusal Rim상태에서 치찰음(S발음)을 유도하며 너스레를 떨면 대부분 완벽하게 환한 웃음을 보여주시는데도 영 호응이 없으셨다. 그래도 어찌어찌 힘들게 제작해온 틀니를 시적하고, 저작과 연하 연습을 시키고, 관리 요령을 알려드리고, 서너 번 정도 의치상 조정을 하고 치료를 끝냈다.

그해 가을이었다. 추석 대목을 맞이해 보건지소 앞에 시골 5일장이 서던 날, 그동안 잘 끼시던 틀니가 아프다고 다시 오셨다. 입안의 궤양이 생긴 부분에 마킹하고 의치상에서 통점(Sore Spot)을 표시하고 조정 해주니 아프지 않으시댔다.

“거봐, 내 손이 약손이지? 다음에도 아프면 참지 말고, 꼭 와, 할머니…”   

할머니는 잠시 머뭇거리다 밖을 다녀오시더니 꽃이 그려진 포장지 하나를 불쑥 내미셨다. 포장을 뜯어보니 발목까지 올라오는 하얀 양말이 한 켤레 들어있었다. 한참을 그 양말을 보고 있는데 조용하고 나즈막한 목소리로 말씀 하셨다.

“우리 바깥 양반 일찍 돌아가시고, 생떼 같은 자식도 가슴에 묻고, 맴이 괴로워서 ‘*시절이’ 마냥 술만 먹고 살았어… 치과 선상이 그동안 나헌테 살갑게 잘해 줬는디, 나는 해줄게 이것밖에 없네. 명절 잘 보냐~.”

할머니는 감사 인사도 받지 않으시고 휙~뒤돌아 가셨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마음이 뜨거워지더니 눈물이 왈칵 쏟아질 뿐이었다. 어려운 형편에 큰 맘먹고 나를 위해 장만하신 선물을 차마 신을 수 없어서 포장지까지 고이고이 그대로 보관해뒀다. 그리고 가끔 말도 안되는 것을 트집잡아 생떼를 부리며 의료진을 힘들게 하는 할아버지 할머니 환자를 볼 때마다 ‘마음은 안 그런데 표현이 잘 안돼 그런 게야’라고 스스로 위로 하게 됐다.

할머니 소식을 다시 듣게 된 것은 그 분이 외로운 죽음을 맞이한 다음이었다. 방문 진료를 담당하는 보건지소 여사님이 정기 검진을 위해 찾아갔을 때, 머리맡에 틀니를 담은 물잔과 함께 이미 돌아가신 상태였다고 했다. 장례를 위해 시신을 수습하고 옷가지와 함께 틀니를 태워드렸다고 했다. 달력 한 편에 동그라미 쳐 놓고 ‘치과’라고 쓰여 있어서 내게 소식 전했다고 했다. 잠깐 눈을 감고 머리를 숙여 명복을 빌었다.

하늘 나라에서는 서툴고 솜씨 부족한 ‘틀니’지만 잘 끼시고, 잘 드시고 건강하셨으면 좋겠다고… 사람이 죽으면 밤 하늘 별이 된다고 들었다. 가끔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수많은 별들이 반짝인다. 내가 만든 틀니도 그 중 하나의 별 안의 별이 돼 있을 거라 믿어 본다.

매년 7월 1일은 대한치과보철학회가 제정한 ‘틀니의 날’이다. 올해로 6번째 맞이하는 틀니의 날을 축하하며, 별을 만드는 사람들의 노고와 수고에 감사드린다.
  
*시절이 : 충청남도 예산, 서산, 당진 부근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를 칭할 때 쓰는 사투리 이다. 전해 듣기로는 일제 강점기에 똑똑했던 마을 청년이 경찰서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머리가 이상하게 된 사람을 칭한다고 했다. 그 쪽 지방에서는 자주 쓰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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